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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시 ⑫ '꼭지' (『배꼽』 문인수 시집, 창비)

최초작성 [JMnet 05.21 10:27] | 마지막 업데이트 [JMnet 05.21 10:29] 이 문서는 총 323번 읽혔습니다.


| 편집 | 꼭지와 함께 애 터지게 걷는 길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꼭지> 전문



할머니 한 분이 어렵게 몸을 이끌고 어딘가로 간다. 시인은 그 노인을 아주 잽싸게 알아차린다. 노인은 독거노인이며, 지금 동사무소로 가고 있다고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한다. 그뿐인가? 시인은 노인의 이름을 아예 “꼭지”라고 명명하고 또 호명한다. 꼭지? 시집 말미의 해설을 쓴 김양헌에 따르면 “꼭지는 슬프다. 질기고 질긴 슬픔이다.” 왜냐하면 “태어나자마자 어미 울음부터 들은 꼭지. 계집 꼭지는 그만 똑 떨어지고 사내아이 점지하라는 부적, 꼭지. 온갖 차별과 멸시를 덧쓴 이름, 꼭지. 여자라 젖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곧 ‘꼭지’는 그지 멀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 그리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여자의 불행한 일생을 상징하는 이름인 셈이다.

시인은 노인의 행색 또한 아주 명쾌하게 묘파한다. 허리 굽은 모습은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고 또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걷는다고, 시인의 이 같은 표현이 어딘지 불경스러운가? 그보다는 어딘지 해학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노인에 대한 시인의 접근은 일순 달라진다. 낮게 엎드리듯 걷는 노인 앞에 “민들레꽃 한 송이”가 등장하는 순간이 바로 그때….. 민들레는 하늘을 보는 시선으로는 찾을 수 없고 아래 혹은 “바닥”을 굽어봐야 알아볼 수 있는 낮은 꽃이다. 시인은 그 꽃을 두고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 노랗다.”라고 지금까지의 어투와는 전혀 다르게, 똑똑 끊어서 말한다. 왜일까?

우선, “노랗다”라는 것은 민들레가 피운 꽃이 노랗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바닥”이라는 것은 민들레가 피어 있는 환경이 길바닥을 의미할 터이다. 그러나 “기억의 끝”은 조금 복잡하다. 길바닥에 엎드려 피어있는 민들레를 본다는 행위가 마음의 행로에까지 확장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렇다면 민들레를 보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곧 이제까지는 시인이 노인을 바라보고 또 알아봤지만, 민들레는 누구의 시선에 포착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 역시 시인의 것일까? 아니면 주체가 시인에게서 노인에게로 순식간에 옮겨진 것일까? 아니면 주체와 객체가 아예 뒤섞인 것일까?

그 같은 의문은 연을 넘겨서도 계속된다. “젖배 곯아 노랗다”가 바로 그것. 어릴 때 어미 젖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진술은 표면상으로는 노인의 것이지만, 노인의 이름을 꼭지라고 명명한 이가 다름 아닌 시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역시 시인의 목소리가 중첩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첩된, 혹은 뒤섞인 목소리가 마지막 말을 한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그리고는 무심하듯, “새 날아간다”라는 객관적 서술이 노인의 이야기를 끝맺음한다. 시의 전반부에서 경쾌하고 해학미마저 풍기던 시가 어느덧 묘한 비장미를 풍기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물론 그 까닭은 일방적이던 시선이 복합적인 시선으로 바뀐 데 따른 것이다.

시인은 노인을 바라보고, 노인을 자신의 생을 바라본다. 시인이 노인을 바라보는 방식은 대상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는 방식이다. 그래서 노인의 굽은 몸은 달팽이가 되었다가 민들레가 되고 민들레는 기억의 바닥에서 꽃핀다. 그곳에서 시인과 노인은 말을 섞는다. 고난의 삶과 삶의 마지막 희망에 대해서. 시인과 노인은 함께 걷다가 앉아서 쉬고, 쉬면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이윽고는 마지막 비상을 꿈꾸고자 한다. 지상의 모든 걸음은 다 그 행로를 밟는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 없이는 날아갈 수 없듯, 지상 그 누구도 홀로 걷지 않는다. 모두 같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길을 가기 때문에, 당연히, 여러 목소리가 있다. 그 사실이야말로 시인의 민들레에 실어 날리고자 하는 말이다.


image:연재-_길_떠나는_시_⑫_2.jpg



글_ 북리뷰어 김용필

2008.05.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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