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영화' ⑩ 빔 벤더스 '시간의 흐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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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걷기, 자신과의 끝없는 화해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이 본디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 두 개의 머리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지나친 교만을 보이며 신들과 겨루려 했기 때문에 제우스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다. 둘로 갈린 인간은 오늘날 알려진 모습이 되었고, 평생 동안 자신의 다른 반쪽을 갈망하며 찾아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잘리고 나자 인간은 이 동 방식을 바꿔야했다. 전에는 빠른 속도로 구르면서 돌아다녔지만, 지금은 걸으며 천천히 전진한다. 걷기는 우리가 태생적으로 갖는 겸허함의 의무를 상기시켜주는 상징이다.”
크리스토프 라무르는 <걷기의 철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오랫동안 철학의 주제가 되었던 인간의 원형보다는 오히려 ‘이동 방식’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빠르게 구르지 않고 ‘천천히 걷는다’는 사실 말이다. 걷기가 우리에게 겸허함을 선사했던 걸까? 물론,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발이 인생이라는 걸 믿는 이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너무 일상적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사로잡은 걷기의 이미지는 대부분 빔 벤더스의 영상에서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 이동 방식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어렴풋하게 던져준 영화가 빔 벤더스의 <도시의 앨리스>(1974)였다. 독일 영화의 부흥(오버하우젠 선언)을 선도하며, 로드무비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벤더스의 영화를 우연히 보았던 것이다. <도시의 앨리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필(루디거 보글러)이 앨리스(옐라 로트랜더)와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지라, 항상 어디론가 기차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면서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 6년 전, 독일에 관련된 사진전(‘베를린, 도시의 변화’)에서 스테판 쿠튀리에와 마이클 베슬리의 사진을 보았다. 독일 공사 현장의 단층을 촬영한 쿠튀리에의 사진과 동베를린 지역의 도시환경 변화를 3년의 장시간 노출을 통해 기록한 베슬리의 사진을 보며, 다시 독일의 공간성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좀처럼 짬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항상 마음뿐이었고 시간은 무심하게 나를 비웃으며 잘도 흘렀다. 결국 작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독일로 떠나는 채비를 할 수 있었다.
걷고 또 걷는 게 독일 여행의 전부였다. 기차에서 고즈넉한 독일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일종의 별미였다. 내가 중점적으로 머문 곳은 평상시에는 관광객이 잘 모이지 않는 뮌스터와 카셀이었다. 10년마다 열리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5년마다 열리는 카셀 도큐멘타를 보기 위해서였다. 2007년 가을은 이 두 행사를 한 번에 만끽할 수 있는 시기였다. 내 마음에 쏙 든 도시는 뮌스터였다. 이곳은 독일 북서부에 위치한 인구 27만 명의 작은 도시다. 전체 대학생 수가 5만 명(도시 인구에 비해 상당히 높은 비율)에 이르기 때문에 ‘대학의 도시’라고 불린다. 그러나 대학생들보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자전거였다. 놀랍게도 진정 자전거의 천국이었다. 인구수보다 더 많은 자전거가 사방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로 뽑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 뮌스터 중앙에 위치한 호수(아호)는 정말 한적하고 평온해서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침마다 호수가 주변의 길을 따라 산책을 했고, 가끔씩 개와 함께 거니는 노인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이제 4회를 맞이한 뭔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구경하는 방법도 아주 심플하고 독특했다. 바로 걷는 거다. 조각 프로젝트라는 명칭 때문에, 조각을 보는 전시로 착각하기 쉽지만 요즘 개념으로 보자면 ‘공공미술’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여기에 특별 전시관이나 갤러리는 없다. 뮌스터라는 도시 자체가 살아 있는 미술관인 셈이다. 그렇다. 이 도시를 전부 걷지 않으면 어떤 작품도 구경할 수가 없다. 사무국에서 지도 하나를 얻어서 마치 보물을 찾듯이 돌아다녀야, 이 설치물들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 뮌스터 대성당을 중심으로 해서 그 외곽으로, 조각물이 혼재해있다.
시내는 슬슬 걸어 다니면서 볼 수 있지만, 외곽을 돌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전거가 필요하다. 자전거는 4시간에 7,000원이면 충분히 대여가 가능하니, 그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걷기와 자전거 타기를 반복하며 미술품을 감상하는 묘한 재미가 있었다. 이 행사는 공공 프로젝트다보니, 시즌이 끝나도 영구보존하는 작품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었다. 2007년에 만들어진 새 작품은 34개 밖에 없지만, 1977년 4점, 1987년 22점, 1997년 13점이 도시 안에 스며들어가 있기에 상당수의 미술품과 만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작품들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친절한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보물찾기가 된다. 특히 1977, 1987년에 만들어진 작품은 상당히 개념미술에 가까워서 더욱 더 미술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행에 나선 이들은 아무도 쉽게 짜증을 내지 않았다. 난 곳곳에 배치된 이 작품들을 찾아가면서 10년 단위로 미술사의 변화도 어느 정도 체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는 걸으면서 도시를 껴안는 여행이었다. 동시에 시간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재발견하는 진행형의 과정이었다.
독일 여행을 떠나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가 있다면, 그건 바로 빔 벤더스의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로드무비 3부작(<도시의 앨리스> <빗나간 행동>)’의 마지막 작품이다. 작은 마을을 옮겨 다니며 소극장의 영사기를 고쳐주는 수리공 브루노(루디거 브글러)와 제노바에서 아내와 이혼한 뒤 절망에 빠진 소아과 의사 로버트(한스 지쉴러)의 여행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베를린 장벽이 굳건하던 시절, 뢰네베르그와 호프 지역의 국경지대에서 촬영했다.
<도시의 앨리스>가 장벽을 넘어서 동독으로 갈 수 없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말하듯, 이 영화 역시 분리된 조국을 발로(혹은 차로) 거닐면서 불완전한 하나의 지도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바로 빔 벤더스가 자신의 아버지 세대에게 보내는 비판이자 원망이다. 전쟁을 겪은 독일의 지식인들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단어만 들어도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영혼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입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워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아버지이자 조상이자 역사가 아니던가? 그들은 과거의 실수를 끊어내기 위해, 아버지를 잃고 단절된 세대로 살 수밖에 없는 멍에를 갖게 되었다. 벤더스의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모더니즘의 폼생폼사가 아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커다란 십자가를 등에 진 숙명이었다. 게다가 그의 영화가 심적 갈등을 내면에 새긴 ‘풍경으로서의 인간’만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그의 황량한 도시 이미지에는 분명 또 다른 징후가 담겨있다.
전후에 독일에서 불어온 근대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이 변화를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벤더스만의 로드무비다. 아우토반과 폭스바겐으로 상징되는 독일의 근대화는 도로를 만들고, 맹목적인 속도전을 도입했다. 그의 로드무비는 단순히 자신의 자아를 찾는 여행에서 끝나지 않고, 이 자본화 과정을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다본다. <시간의 흐름 속으로>에서 삶의 번뇌에 사로잡힌 로버트는 자신의 자동차를 강물에 빠트려버린다. 오히려 로버트는 현대사회의 진보가 만들어내는 ‘속도’에서 이탈해서, 자신의 현재를 정지시킨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브루노의 트럭을 선택한다.
브루노의 여행은 사실 미래나 현재가 아니라, 과거로 가는 여행에 가깝다. 브루노는 점점 사라져 가는 극장에서 영사기를 고치며 추억의 그림자놀이를 벌이기 때문이다. 로버트가 상처뿐인 자신의 과거를 들먹이자, 브루노는 “네가 누구냐?”라고 질문한다. 그리고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필요 없어. 현재가 곧 나의 역사야!”라고 외친다. 아버지의 폭언을 용서하지 못하는 로버트는 과거에 발목 잡혀 있지만, 율리시즈처럼 길고 긴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은 브루노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과 하나가 된 현재다. 우리는 이미 이 여행이 어떻게 끝나야할지 답을 알고 있다. 남(혹은 아버지 세대)을 용서하는 일은 결국 자신에게 스스로 화해를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진리를 깨닫는 건 바로 도로 위에서다. 그렇다. 걷는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는 법이다.(*)
글_ 전종혁 <프리미어> 기자
2008.03.27. [조인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