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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책' ⑦

최초작성 [JMnet 04.14 11:47] | 마지막 업데이트 [JMnet 04.14 11:47] 이 문서는 총 343번 읽혔습니다.


| 편집 | 자명한 산책, 게으르고 또 게으른 산책

image:게으른_산책.JPG

시인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이라는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간만에 기회가 찾아온 긴 여행을 준비하면서 왜 이 시를 떠올렸을까? 어느 여행자가 안 그럴까만, 기꺼이 선택한 여행지에서 ‘자명한 산책’을 즐기고 싶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한 느낌의 산책으로 여행을 채울 수 있다면 그만한 호사가 또 있을까 싶었다. 물론 그런 여행의 동선은 상투적인 관광지로 짜여져선 안 된다. 여행지의 디테일한 일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현지인의 발바닥의 동선으로 짜여져 야 한다. 하지만 그런 여행의 준비는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었다. 인터넷 검색은 여행지에 대한 어설픈 체험기와 관광지 안내문 정도만 제공할 뿐이었다. 여행지에 관련된 책들을 찾았지만 글과 사진을 좋아한다는 아마추어들의 기행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족 삼아 덧붙이면, 지난해에 찾아 읽은 어느 유명 소설가의 사진 여행 산문집 <여행자>는 가히 직무유기에 가까운 구성으로 헛웃음만 자아내게 만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웬만한 내공으론 여행 산문집에 손을 대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 된다고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이번에 함께 읽을 에드먼드 화이트의 <게으른 산책자>(강주헌 옮김, 효형출판)의 몇 구절을 들여다 보자.

“파리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마흔세 살이었지만 청년처럼 기운이 넘쳤다. 그러나 파리를 떠날 때에는 어느덧 백발로 변하고 아래턱이 축 처진 환갑의 나이였다. 처음에 나는 오스테를리치 역 근처의 센 강변을 따라, 외팔보를 강변까지 쭉 내민 건물 아래를 거닐었다. 때로는 내가 살던 생루이 섬 끝자락에 있는 아담한 공원의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수풀을 헤치며 걷거나, 침몰하는 선박의 하갑판처럼 섬의 끝자락을 둘러싸고 있는 둑까지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하얀 담을 타고 치렁치렁 휘늘어진 담쟁이덩굴을 볼 때마다, 나는 에즈라 파운드의 두 번째 <칸토스>에 실린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스 선박이 바다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붙들려 산으로 변해간다는 시구였다.”


이 글의 주인공 에드먼드 화이트는 1983년에 프랑스로 떠나 16년간 파리에서 살았던 미국 작가다. 파리에 매료된 그는 16년 동안 한결 같이 센 강변을 따라 걷고, 파리의 골목골목을 배회했다. 누군들 파리의 뒷골목에 매료되지 않을까만, 에드먼드 화이트에게 파리는 더욱 각별한 곳이었다. 당연히 파리를 경험하는 그의 방식 역시 각별했다. 그 각별함의 비결 중 하나는 ‘성실한 대화’였다. 그의 파리 체류 시절 만났던 사람들은 물론, 지금의 파리를 만든 과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 예컨대 프루스트와 조르주 상드, 콜레트, 앵그르, 들라크루아가 대화의 상대였다. 화이트는 그들이 생생하게 호흡하는 공간에서 진심으로 대화를 나눴다. 아래의 인용들은 모두 화이트의 것들이다.


image:파리의_풍경.jpg

“결국 나도 파리 사람들처럼 ‘숨 막히는’ 구역이라 이름 붙은 곳과 ‘생기발랄한 곳’, 즉 일하는 사람들의 공간과 패기 있는 젊음이 있는 공간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구분은 훨씬 나중에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순전히 관찰에만 의존해야 했던 처음에, 내게 파리는 솔기가 없는 완벽한 한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미국인의 기준에 따르면 모든 것이 제대로 관리되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또한 모든 것이 차갑게 느껴지면서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매력을 자아냈다.”


“나는 산책자에게 8구의 몽소 공원을 걸어보라 권하고 싶다. 개선문과 샹젤리제에서 북동쪽으로 잠깐 걸으면 몽소 공원이다. 프루스트는 이 근처에서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쿠르셀가 45번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이웃으로는 <삼손과 데릴라>를 작곡한 카미유 생상스(83번지)와 콜레트가 있었다.”


“파리에는 이상한 소규모 박물관과 미술관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부분이 외진 곳에 있어, 영원히 이름을 남기려던 사람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망각의 늪에 내던져진 신전이라 불리는 것일까? 하지만 현대적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데도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박물관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에드먼드 화이트가 ‘긴 여행지’인 파리와 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책 속에서 그가 스스로 밝힌 방법은 ‘산책’이다. 이름하야, 게으른 산책! 흥미로운 건 그런 그의 산책법이 맨 위에 언급한 ‘자명한 산책’과 닮았다는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한 느낌의 산책 말이다.


“문학계에서 최후의 산책자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1929년의 한 수필에서 그는 산책자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산책자는 파리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놀랍겠지만 로마의 창조물이 아니다. 하기야 로마에서는 꿈꾸는 것조차 잘 정돈된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는가! 또한 로마는 옆 사람의 꿈에 고스란히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성당과 꽉 막힌 광장, 신전으로 그득한 도시가 아닌가? 어디를 가나 돌로 포장된 길이고 가게 간판이 보이며, 게다가 빠른 발걸음에 눈이 어지러운 로마가 아닌가! 이런 위대한 기념물이 자아내는 역사의 전율감은 산책자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산책자는 그런 전율감을 기꺼이 관광객들에게 양보한다. 산책자는 예술가들의 동네와 고향이나 장엄한 왕궁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 비바람에 풍화된 문지방 냄새를 맡고 오래된 기와를 만져보는 것! 더 행복해한다. 심지어 늙은 개가 물어다 놓은 기와에도!’ 이 짤막한 글에서 벤야민은 산책자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냈다. 남자든 여자든 산책자는 유명한 관광지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반드시 찾아가 봐야 할 명승지 목록에서 그곳을 확인하는 외국 관광객이 아니다. 산책자는 개인적인 시간을 염원하는 파리 사람이다. 명승지를 찾아 교훈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니다. 명승지가 지식함양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관광객에게 짜릿한 희열을 안겨주기란 힘들다. 그렇다. 산책자의 눈길이 닿는 곳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프루스트의 기준에 따르면 마들렌이고 비뚤어진 포장용 돌이다. 그리고 세월의 때가 묻은 문지방, 낡은 기와….”


image:파리의_풍경2.jpg

언젠가 나이가 지긋하게 들면 체코의 프라하에 가겠다는 소망을 머릿속에 그려본 일이 있다. 죽기 전에 황금소로에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작업실에 들르겠다는 이유였다. 에드먼드 화이트처럼 16년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고작해야 일주일 정도의 체류기간이 주어지겠지만 그 기간 내내 카프카의 작업실과 그 주변만 배회하다 돌아오겠다고 생각했다. 일생동안 프라하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카프카의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그의 작품에 단 1%라도 더 발을 들여놓게 되지 않을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그런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동선에 담긴 프라하의 풍경과 일상과 사람들의 호흡 하나라도 더 디테일하게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게으르지만 자명한 산책법’으로 16년간 시종일관했던 에드먼드 화이트의 마지막 소회처럼.


“아직도 파리는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중략…)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처럼 산책자는 프랑스 무명용사들이 묻힌 사크레쾨르 성당의 계단에 서서, 파리 전체가 그의 발밑에 펼쳐진 모습을 지켜본다. 공원의 시장 주변의 길도 훤하다. 헌책방과 백화점을 찾아가는 길도 잘 안다. 백화점들! 여름옷의 할인 판매로 끝나는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으로도 유명한 세계 최초의 백화점들이다. (…중략…) 이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돈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그저 산책자의 기억 속에 남겨지길 기다리는 모습들이다.”


산책하는 자의 기억 속에 남겨질 그것들, 그것이야말로 세상 최고의 지복인 것을!



글_ 프리랜서 문미루

2008.04.14. [조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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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책'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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