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영화’ ⑫ 가와세 나오미의 '너를 보내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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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걷기, 상실과 부재에 대한 위로
“내가 말하는 산책이란 환자가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는 것처럼 이른바 운동을 하는 것, 가령 아령이나 의자를 흔들어 대는 것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산책은 그 자체로 하루의 일과요 모험이다. 만약 운동을 하고 싶거든 생명의 샘물을 찾아 나서라. 어떤 사람이 건강을 위하여 아령을 흔들어 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저 멀리 목초지에 그러한 샘물들이 솟아오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산책을 할 때에는 걸으면서 되새김질하는 유일한 동물인 낙타처럼 산책하여야 한다. 한 여행자가 윌리엄 워즈워스의 하녀에게 주인의 작업실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자, 하녀는 ‘여기가 그분의 서재입니다. 그분의 작업실은 집 밖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산책>에서 낙타처럼 걸으라고 권유한다. 느릿느릿 걷는 낙타라니? 이것은 아마도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산책하며 되새김질하라는 뜻일 것이다. 소로의 걷기는 땀에 흠뻑 젖는 운동이 아니라 사색의 시간이자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하루에 적어도 4시간 이상 숲이나 들판을 산책했던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걷기를 이렇게 상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로는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을 세밀하고 주의 깊게 관찰했던 현인 중에 하나였다. 물론 스크린에서도 자연과 특별한 교감을 꿈꾸는 감독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를 테면 허우 샤오시엔은 과거의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1980년대 대만의 자연과 시골(<연연풍진> <동동의 여름방학>)을 삶의 애환으로 담아냈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1990년대 이란의 작은 마을과 길을 보여주던 지그재그 3부작(특히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 이런 대가들의 자연관은 우리에게 인생을 성찰하게 만드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을 추가한다면 1997년 칸영화제에 초청된 한 편의 영화를 떠올려 볼만하다. 27살의 작은 일본 소녀가 내놓은 작품이었다. 약간은 수줍고 소녀 취향의 감성을 떨쳐 버리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자연을 진솔하게 보여주었다. 더욱이 키아로스타미의 영묘한 올리브 나무만큼이나 삶의 신비함을 전해주던 숲의 움직임이 담겨 있었다. 바로 가와세 나오미의 <수자쿠>였다. <수자쿠>의 녹색 숲에는 한 소녀의 사랑과 슬픈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수자쿠>의 귀여운 여주인공 오노 마치코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그녀를 다시 만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너를 보내는 숲>을 완성한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하는 이 영화는 아이를 잃은 상처를 간직한 마치코가 시골의 한 요양원에서 노인들을 보살피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그 중 사고뭉치 노인네 시게키를 보살피던 마치코는 그를 쫓아 우연히 숲으로 떠난다. 영화는 이때부터 이들이 숲으로 가는 과정을 뒤따른다. 그러나 이들이 숲이나 녹차 밭을 걷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신비로워진다. 가와세의 카메라는 자연 속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걸음 하나하나를 담아냈을 뿐인데 말이다.
마치 소로가 <윌든>에 묘사했던 자연의 섭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자애로워서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건강과 환희를 안겨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지 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함께 슬퍼해 줄 것이다. 태양은 그 밝음을 감출 것이며, 바람은 인간처럼 탄식할 것이며, 구름은 비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숲은 한여름에도 잎을 떨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내가 어찌 대지와 교류를 갖지 않겠는가? 내 자신이 그 일부분은 잎사귀이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던가!”
소로의 주장처럼, 자연에는 바로 산책하는 이들의 감정이 녹녹하게 담겨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간 마치코와 시게노는 아이들처럼 숨바꼭질을 하고 수박을 나누어 먹거나 밤에 불을 때면서 몸을 녹인다. 심지어 몸이 아플 때는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살아남는다. 이들은 그렇게 점점 자연과 하나 되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결국 모든 것이 시게키의 아내가 잠든 숲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란 게 드러난다.
사실 가와세 나오미에게 영화작업은 걷고 또 걸으며 자신의 친구인 숲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녀의 영화에서 숲은 자신의 심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수자쿠>의 숲이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이자, 사물의 무상함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정서인 ‘모노노 아와레(もののあはれ: 사물의 마음 또는 사물의 비애와 슬픔을 아는 것)’에 가깝다면 <너를 보내는 숲>은 애도의 시간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殯の森 모가리 노 모리>로, ‘모가리’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그 장소를 의미한다. 이미 가와세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기만의 의식을 <캬카라바아>(2001)에서 치른 것처럼 <너를 보내는 숲>에서도 시게노는 아내를 위한 애도를 펼친다(그는 33년 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며 써내려간 일기를 그녀의 무덤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가와세의 영화는 유령에게 보내는 진혼곡이나 굿판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죽은 자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함이다. 그렇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 묶어두지 않고, 편안하게 보내주기 위함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폴 혼슈마이어의 <엄마, 돌아와요>에 등장하는 마이클 테넌트처럼 아들 토마스를 남기고 무기력하게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너를 보내는 숲>은 아름다운 녹차 밭이 발산하는 푸른 영상과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로 가득하다. 가와세의 고향이기도 한 나라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자연 경치는 결코 시각적인 경험에서 그치지 않는다. 관객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은 뜻밖에도 바람의 속삭임이라는 것도 이 영화의 정겨운 수확이다. 한마디로 영화는 상실의 아픔을 공유한 마치코와 시게키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동시에, 아픔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엔딩의 결말이 아니라 이들의 변화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는 설정이다. 그들은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버리고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그들의 놀이는 단지 자연을 걷는 거다. 단지 그들의 걸음이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 삶은 금방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가와세의 카메라에 롱 쇼트로 담긴 것은 단순히 미적인 랜드스케이프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수놓은 마인드스케이프다. 그 숲에서 어떤 신비한 매력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들의 진심이 우리의 마음을 잔잔히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존재의 원천적 힘이자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영묘한 바다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 찾아온 셈이다. <너를 보내는 숲>를 경험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삶은 결국 일상의 발견이라는 걸 다시 일깨운다. 그건 걷는 일에서 시작한다.(*)
글_전종혁 <프리미어> 기자
2008.04.23. [중앙일보]









